난창(南昌) 해혼후묘(海昏侯墓)베일 벗다南昌海昏侯墓揭秘

2016-10-14 07:09李圆圆CFP
金桥 2016年4期
关键词:首都博物馆成果展海昏侯

리위안위안(李圆圆)CFP



난창(南昌) 해혼후묘(海昏侯墓)베일 벗다
南昌海昏侯墓揭秘

리위안위안(李圆圆)CFP

2016년 3월 2일,난창(南昌) 한나라 해혼후묘(海昏侯墓)에대한 고고학적 성과전이 베이징의 수도박물관에서 개막되었다. 그 동안 많은 참관자들이 찾아왔다.2 0 1 6年3月2日,南昌汉代海昏侯墓考古成果展在首都博物馆开幕,参观者爆满。

정교한 모양의 온화한 마제금(馬蹄金), 산적한 오수전(五銖錢), 용과 호랑이가 투조된옥패, 청동 신선로, 동주(東周)시기의 청동부(青铜缶), 옻재질의 병풍…고고작업의 진전으로 쟝시(江西) 난창(南昌)해혼후모(海昏侯墓)가 그 신비의 베일을 벗어가고 있다.

‘부가적국(富可敵國, 재산이 매우 많음을 이름)’청동부의 해혼후묘 주인은 대체 누구인가는 2015년 말부터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 하는 수수께끼였다. 그 답이 마침내 드러났다. 바로 한폐제유하(劉賀)이다.

2011년 3월부터 시작된해혼후묘의 고고사업은 5년간의 발굴작업을 통해 이미각종 문물 2만여 점이 출토됐다. 현재 장시성은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목표로 유하묘및 그 주변 유적의 보호계획을 기안하고 국가고고유적공원과 유적박물관 건설 작업을추진하고 있다.

묘의 주인은‘돈이 모자라지 않았다’

‘부가적국’의 해혼후묘주인이 마침내 밝혀졌다.

쉬창칭(徐長青) 쟝시성 문화재 고고학 연구소 소장은관 안에 아직 묘 주인의 유골흔적이 남아 있으며 유골 허리부분에‘유하’글자가 새겨진 옥도장이 있었다고 밝혔다. 그리고 출토된 목판에 유하와 그 부인이 각각 황제와황태후에게 올린 상소가 있었으며 유하의 상소에는‘신(臣)하(賀)’두 글자가 쓰여있었다고 소개했다.

해혼후묘에서는 금분(金饼), 마제금과 린지금(麟趾金,기린 발가락 모양 금) 등 금제유물 총 378건이 발굴됐다.이는 지금까지 중국에서 발견된 한대 무덤 중 가장 규모가 크고 부장품 종류가 가장완전한 무덤이다. 이들 유물의 금제 순도는 모두 99% 정도이다. 고고학자는 고분 안작업자들은‘…해혼후신하…주황금…’의 손상된 묵서도찾아냈는데 이는 이들 금분과당시 서한의 주금제도가 서로관련이 있음을 보여준다. 주금제도는 한문제 시기부터 시에서 출토된 오수전 진열대와바로 옆에 있었다 해도 이런금들은 화폐가 아니라고 밝혔다. 마제금과 린지금은 관곽 근처에 놓여 있었는데 천마, 서수(길함을 상징하는 동물)가 무덤 주인을 데리고 승천하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고한다.

해혼후묘에서는금분(金饼) 등 금제 유물 총 378건이 발굴됐다. 이는지금까지 중국에서발견된 한대 무덤중 규모가 가장 크고 부장품 종류가가장 완전한 무덤이다. 사진에는 출토한 금분이다.在海昏侯墓中,共发掘出金饼等金器378件。这是迄今中国汉墓考古中发现金器数量最多、种类最全的一次。图为出土的金饼。

이들 금제의 순도가 이렇듯높은 것은 한대의 주금(酎金)제도에서부터 설명해야 한다.

주금은 왕실의 종묘에 제사를 지낼 때 제후들이 공양하던 금을 말한다. 그리고 이번에 출토된 금분에서 고고학행되기 시작했는데 만일 주금의 순도가 충분치 않으면 제위를 잃게 되는 불상사를 맞기도 했다. <사기>에는 한무제가 장부를 검사해 주금을 부족하게 바친 사람은 제후왕및 열후 세력을 약화시키거나공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밖에 내관에서 금루옥의가 발견되진 않았지만 묘 주인의 유골 아래 쪽에 금도금된 사루유리석(丝缕琉璃席)이깔려 있었다. 금도금된 사루유리석은 한대 묘 고고학 발견 중에 보기 드문 물건이다.

출토 문물, 한폐제에대한 ‘판결 뒤집다’

유하가 폐위된 것은 정말로‘황음’때문일까?‘황음으로 몰렸던’2000년 후 한폐제, 제1대 해혼후 유하의 인생스토리가 현재는 완전‘반전’으로 돌아섰다.

문헌 기록을 보면 유하는평생 왕, 제, 서민, 후 4개의신분을 거쳤다. 4세 때 왕이되었고 18세에는 제왕으로불렸으며 즉위 27일만에 폐위되었다. 그 후 평민신분으로 산둥에서 10여 년간 유배생활을 하다 29세 해혼후로봉해지고 예장국(오늘날의 장시 난창)으로 이주했으며 그후 5년이 채 못 돼 봉지(封地)에서 서거했는데 향년 33세였다.

27일의 제위 기간 한서(漢書)는 유하에게‘황음에 미혹되어 제왕으로서의 체통을 잃고 한나라의 제도를 어지럽혔다’라고 죄목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유하의 묘에서 출토된 문물은 오히려 역사상의기록과 다소 다르다는 것을방증하고 있다.

특히 출토된 편종, 거문고, 슬(거문고와 비슷한 고대 현악기), 팬파이프 등 예악기, 공자상 및 공자의 생애가 그려진 병풍, 각 양식의 벼루, 묵 및 만 개에 가까운 죽간, 옻 재질의 바둑판 및 손잡이 달린 서주청동술병, 동주청동부 등 문물들은 사람들에게 문화와 정취를 아는 군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한대‘사사여사생(事死如事生, 죽은 사람 섬기기를 살아있을 때와 같이 하다)’의장례풍속 및 동침서당(東寢西堂)의 곽실구조에 따라 주곽실 서쪽에 유하 생전에 손님을 만나던 장소로 모방하여만들었다.“유가 숭배가 당시상류계층에서 유행했으며 병풍이 응접실에 설치된 것은최소한 유하가 성현을 숭상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장중리(張仲立) 해혼후묘 고고 발굴 전문가팀 팀장이자 산시성고고연구원 연구원은 이같이말했다.

유하가 폐위된 것은 황음무도 해서가 아니라 권신 곽광(霍光)의 분노를 샀기 때문이다. 진한 고고학계와 진한 역사학계의 전문학자는 이에 대해 보편적으로 인정한다.

이야기는 이제 시작됐다.

현재까지 유하 묘에는 해결되지 않은 많은 수수께끼가 남아 있다. 예를 들어 공원묘지에서 합장묘와 주묘 간의 관계는? 고고학계 일인자‘하상주단대공정(夏商周斷代工程)’수석과학자 리바이쳰(李伯謙)은 7번 합장묘에매우 관심을 보인다.“그의묘도는 서쪽을 향해 있으나주묘를 비롯한 기타 묘는 모두 남쪽을 향해 있습니다.”

훨씬 더 많은 전문가들의관심은 유하묘 정북방향의 5호 묘에 쏠려 있다.

자오화청(趙化成) 베이징대학 고고문박학원(考古文博學院) 교수는 5호 묘 주인의 성별이 키포인트로 ‘열후묘의공원묘지가 제후왕묘처럼 공원묘지에 주로 부인만 매장할 수 있었는지’를 판단할수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 리링(李零)은 만일 공원 묘지에정말 유하 아들의 묘가 있다면 그들 간의 연대관계를 밝혀 낼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묘의 일부에서 처음발견된 문물의 기능도 연구가기대된다. 예를 들어 도금된사루유리석 말이다.

“관 안 문물의 겹겹의 흔적으로 보아 유리석이 몸을덮었을 가능성도 있고 유리이불일 수도 있다.” 두진펑(杜金鵬) 해혼후묘 고고발굴 전문팀 실험실 고고학 소팀 담당자는 유리석에 대해 다른견해를 밝혔다.

쉬창칭 소장은“모든 공원묘지의 고고작업은 수십 년이 걸려야 완성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유하 일생의 궤적은 마치 포물선 같다.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그의 이야기는이제 막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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